• 로리는 벽 안에 산다
    똑똑
    예의 바르게 로리를 방문할 것
    로리는 언제든 사나워질 준비가 돼 있으니까
    
    로리는 종일 벽 안을 돌아다닌다
    로리는 말이 없다
    로리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러니까 로리에게 소통을 요구하지 말 것
    
    로리는 사람들이 지겨워할 정도로 
    달라붙는 경향이 있다
    
    때로 로리와 이별하려는 자들은 
    복통을 동반한 우울증을 겪어왔다
    몇 개의 밤을 새우고
    누워있어도 계속 쓰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여자가 하얀 얼굴로 벽을 두드렸다
    똑똑
    이봐요, 아니 대체 내가 뭘 잘못했죠?
    
    ......
    
    로리는 판결문을 꺼내 밖으로 던졌다
    
    아무 때나 KISS를 행하여 감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리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였기에 
    이와 같은 미수죄에 대하여
    고무장갑처럼 피부의 안팎이 뒤집히는 2주 간의 형을 선고함
    
    여자는 고꾸라질 듯 울며 떠났고
    동네 연인들은 키스를 참았다
    
    그곳에선 더 이상 로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 이 방에선 해가 지는 걸 오래 볼 수 있다 
    창밖으론 나지막한 언덕을 따라 볼록볼록 무덤이 나 있다 
    무덤들은 남쪽을 향해서 모여있다 
    
    창으로 눈길이 갈 때면 나는 한쪽 눈을 감았다 
    그러자 풍경을 보고 있는 건지 안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얘길 들은 친구가 다독였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가족묘일거야 
    
    가족묘는 안 무서운 거겠지? 가족은 따뜻한 거니까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말했다
    무시할 수 없겠는걸, 인사드려야겠네
    일 년 동안 잘 부탁합니다 하는 거지. 좋으신 분들일 거야
    
    그녀는 조상신을 믿는다고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자신을 지켜주는 것 같다고
    
    4 년 전 치른 잔디 장이 떠올랐다
    나의 할머니는 잔디의 영양분이 되었을 거다
    
    커튼을 치고 꿈속으로 몸을 누였다
    
    마른 능선 위로 
    누운 동물의 젖가슴처럼 볼록한 무덤들 위로 
    빼곡히 난 잔디가 보였다
    
    할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 1
    
    당신은 아끼던 MP3 파일이 쓸모없어진 경험을 했다
    처음 스트리밍 음악을 들었을 때였다
    애플사는 당신의 동의도 없이 스트리밍 음악 파일 음악을 섞어 보관하기 시작했다
    (음악이 음악이지 뭐, 라며 결정 내린 건지도)
    
    당신에게 스트리밍 파일이란 속이 텅 빈 채 구름 위를 떠다니는 전자신호였고
    MP3 파일은 옮겨 담을 수 있는 물건 같은 것이었다
    
    이제 음악이란 시냇물처럼 잡히지 않고 기억처럼 현재와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되었다
    (사실 그게 음악의 본질일지도)
    당신은 네모난 앨범 이미지로 간신히 그 존재를 파악한다
    
    
    2
     
    당신은 개인적인 경험과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데 힘써왔다
    그러다 최근 유행 담론이 당신의 작업과 꼭 맞다는 걸 발견했다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당신에겐 두 개의 마음이 떠올랐다
    
    첫째,
    당신 작품 곁에 이 담론을 함께 둠으로써
    동시대 작가로 의미 있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란 마음
    
    둘째,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을 이 담론 안에서만 바라보면
    담론의 유행이 사라질 때쯤 당신도 여느 유행 작가처럼 버림당할 것이며 
    지난날 쌓아온 경험과 연구는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취급당할지도 모른단 마음
    
    
    3
    
    당신은 결혼식을 치렀다
    구청에 방문했고, 혼인신고서에서 뜻밖의 질문을 마주했다
    
    - 성, 본의 협의: 자녀의 성, 본을 모의 성, 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 
    예□ 아니오□ 
    
    그건 분명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가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출산의 협의도 안 끝났거니와
    아이 이름을 재미 삼아 지어본 적도 없고 
    간혹 어머니 아버지의 성을 이어 붙인 사람을 만나면
    정치적 신념에 박수를 보내지만 나는 아니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밥 먹고 사는 데 그건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 끝의 물음표가 당신의 머릿속에서 점점 부풀어 올랐다
    당신과 배우자는 작성하던 신고서를 들고 머쓱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4
    
    나는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내 것이라 믿어왔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걸 들었을 때, 그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었을 때 
    그건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아니란 걸 알았다
    
    이야기는 종이에 적히면 날아다니기도 했다
    날아서 누군가에게 읽히고 그 사람의 몸에 꼭 맞는 이야기로 변했다
    
    그래서 나는 애초부터 내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기로 했다
  • 우리 같은 종(種)들은 다들 살아있음에 대해 말하지.
    자신이 죽는 줄 아는 유일한 생물. 이라고 믿는 생물
    
    저기, 불멸의 언덕에 가본 적이 있어?
    고양이들이 떼지어서 놀고 있다 하던데. 고양이 떼라니,
    
    두 발로 직립 보행을 하다보면, 그게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
    어떻게 발을 없애지?
    
    오늘은 네발로 기어 돌아와 낙지볶음밥을 먹었어.
    여덟 다리 몽땅 잘라도 잘만 꿈틀거리는 동물
    
    우리들은 배가 불러 꼼짝 없이 눕기로 했어.
    애초부터 다리가 없던 것처럼.
    
    꿈에서 갓 녹은 냉동인간을 만났어.
    흐물해진 손가락과 차가운 악수를 나누었다면
    그의 영혼을 확인할 수 있었을텐데
    
    나는 도마*처럼 눈을 흘기며 알고 싶어했지만
    
    꿈에서 깨었을 때 주위는 어두웠고
    나는 몸을 일으켜 발끝에 슬리퍼를 끼웠지.
    
    
    * 기독교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도마(Thomas)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여 그의 몸을 만졌고 그제서야 믿을 수 있었다. 
  • 유고시집을 읽었다
    
    한 시간 반 만에
    
    한 권의 생
    전부 캐묻고 난 뒤에 미안해진 얼굴로
    아껴 볼 걸 그랬나
    그래도 한 번에 보면 맥락이 느껴지니 좋지
    
    시집의 두께론 밝혀낼 수 없는
    시인의 시간들을 생각한다
    
    “오늘은 전국에 온종일 
    보슬비가 내리겠습니다
    강수량은 3밀리미터 안팎으로...”
    
    저녁의 테라스에서
    종이컵 얕게 깔린 빗물에 
    손가락 끝을 겨우 담가본다
  • 만져보자
    
    살아있을 때
    살아있는 만큼
    
    제일 좋아하는 손가락으로
    믿음직한 손길로
    정수리부터 아래로
    실루엣을 따라가자
    
    나는 두 눈을 감고 
    부피만 바라본다
    감촉을 흡수한다
    
    치즈색 고양이 엉덩이와 하얀 뱃살
    통통 
    너와 함께 쓰다듬는다
    고양인 손대신 머리로 날 비빈다
    
    아하,
    나도 따라 머리로 비벼본다
    고양이의 뺨
    너의 뺨
    
    가슴팍
    허벅지
    발바닥
    
    다시 손으로
    매일 우리는 마사지한다 서로
    
    그리고 밤이 오면,
    죽은 친구의 팔둑살 
    삼베입은 할머니 발
    꿈에서 만진다
  • 몸이 말한다 ‘내 마음’
    마음이 말한다 ‘내 손’
    손이 말한다 ‘내 얼굴’
    얼굴이 말한다 ‘내 눈’
    눈이 말한다 ‘내 심장’
    심장이 말한다 ‘내 근육’
    근육이 말한다 ‘내 목소리’
    목소리가 말한다. ‘내 목젖’
    목젖이 말한다 ‘내 몸’
  • 허공으로 슥
    뭉툭한 검은 선
    달아나듯 오른다
    
    스윽
    
    선은 늘어지게 
    느려지고 길어지기를 멈추고
    끝이 고꾸라진다
    할머니 지팡이
    내려온다
    
    바람 불때는
    좌든 우든 간에
    머리카락 되어 날린다
    누군가 펜으로 그린
    
    하강하는 검은
    선?
    아니 점일 것이다
    간격을 두고 점이 내린다
    
    검은 비가 온다
    툭툭
    거세진 비는
    죽죽
    다시 선으로 내리고
    
    하지만 나는 눈 가늘게 뜨고 안을 들여다본다
    점이 보인다 
    
    땅을 친 뒤에는 구불한 선 
    지평선을 따라간
    비는 모른 새 노래로 변하였다
    
    선율을 듣 지 않 고
    음 하 나 씩 만
    들 을 수 있 을 까
  • 우리집은 다섯이지만
    휴가갈땐 넷이다
    
    할매는 다리가 아파서 몬가
    꼴뭉생이 이래가 어델가노
    
    할머니는 휴가가 없다
    
    언젠가
    할머니의 고향을
    같이 가보자 말했다
    
    가서 뭐하노
    
    나는 오월에 신부가 되었다
    
    해가 타는날
    할머니는 내 머리만큼한 사물이 되었다
    도자기 피부를 입었다
    가짜 꽃 사이에 네모 반듯 새 돌이 피었다
    사물은 풀로 자라겠지
    가족은 30년간 풀을 만날 계획이다
    
    땅은 해를 성실히 돌고
    
    어제,
    다섯이 휴가를 갔다
    
    오는길에 풀 옆에서 충무김밥을 먹었다
    
  • 눈을감고 머릿속에 가로 44 세로 44픽셀의 정사각형을 그려봅니다.

    그게 우리 손가락 앞에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자 그 정사각형을 비율에 맞춰 양손으로 쭉 늘여주세요.

    쭉~~ 가로 44센치 세로 44센치의 정사각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정사각형을 천천히 내 발 아래 둡니다.

    보이진 않지만 나의 자리를 최소 44제곱센티미터 공간으로 설정해봅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어깨에 힘을 빼볼게요.

    천천히 머리를 배꼽쪽으로 말아서 아래로 내려가봅니다. 스크롤~~다운 앤 업~~~